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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막고굴(莫高窟)

뽕이뽕 2008. 4. 28. 15:10
막고굴(莫高窟)
Silk Road 여행 | 2005/11/28 (월)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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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 유산"

돈황에 있는 석굴을 천불동(千佛洞) 또는 막고굴(莫高窟)이라고도 부른다.   
현성(縣城) 동남쪽 30km 떨어진 명사산(鳴沙山)의 기슭에 1,600m에 걸쳐 2단 또는
3단으로 파여 있고, 흙이나 모래에 파묻혀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약 480굴에 달한다.
착굴의 시작은 동진(東晋)의 영화 9년(353), 또는 전진(前秦)의 건원 2년(366)에
승려 낙준이 시작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제275동은
그 양식으로 볼 때, 운강석굴(雲岡石窟)이 시작된 북위(北魏)의 화평 연간(460~465)의 것이다. 
북위(北魏),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隋), 당(唐), 오대(五代), 송(宋), 
서하(西夏), 원(元)에 걸쳐서 석굴의 개착이나 수리가 계속되었다.
석굴은 승원굴(僧院窟)의 영향을 받아서 방형평면(方形平面)으로 좌우 벽면에
불감(佛龕)을 만들어 불보살을 안치하는 형식이다.
석질이 거친 반암이므로 네벽과 천장을 칠식(석회와 찰흙을 불가사리로 반죽한 것)
으로 칠했고, 그 위에 벽화를 그리고 소조로 된 불상을 안치시켰다.
불상의 종류는 2,415존에 달하며, 한 두가지 예외적인 석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소상(塑像)으로서 색채가 선명하게 칠해져 있다.
벽화는 당시 성행하던 석가, 미타, 약사 등의 정토변상(淨土變相)과 《법화경》
《유마경》 《보은경》 《화엄경》 등의 변상도와 본생도, 불전도 등의 그림이다.
불상이나 벽면의 양식은 인도 서역풍, 중국의 재래 양식, 티베트 양식 등 다양하다. 
낙양을 시작으로 하는 목조건축이 없어진 오늘날 돈황석굴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돈황 석굴은 금세기 초 각국의 학자가 방문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07년에는 영국의 스타인Sir Mark Aurel Stein(1862~1943)이 탐험하여 
약 15,000점의 한문, 티베트 문자로 된 경전, 고사본과 500여 점의 비단, 
종이, 마포에 그려진 불화류를 가지고 돌아갔다.
현재 그것들은 영국박물관, 영국도서관, 인도 국립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1908년에는 프랑스의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에 의해 석굴의 사진이 소개되고,
약 5,000여점의 고사본, 약 150점의 회화, 공예품이 파리의 국립도서관,
기메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이때, 이곳에서 발견된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도 프랑스로 넘어가고 말았다.
1911년에는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1914년에는 러시아의 올덴부르크(Sergei
Fedororich Oldenburg)(1863~1934) 일행이 각각 방문하였다.
오타니 탐험대의 발굴품은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그리고 올덴부르크의 발굴품은
에르미타주미술관과 구소련국립동양연구소 성 페테르부르크 지소에 보관되어 있다.
그 뒤 미국의 워너Langdon Warner(1881~1956), 중국의 진만리陳萬里(츠언 완리),
향달向達(시앙 따) 등이 조사했다.
1944년 중화민국 정부는 돈황예술연구소를 창설하였으며 그 후
장대천長大千(즈앙 따지엔) 등의 조사와 벽화모사가 행해졌다.
1952년에는 새 중국정부에 의해서 돈황문물연구소(敦煌文物硏究所)가 개설되어 
보존과 조사를 진행하고 있고, 현재는 이 연구소의 동굴 번호가 학계의 표준이
되고 있다.
돈황의 유적과 출토된 문물의 연구를 총칭하여 '돈황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석굴 속에 있는 좌불, 와불의 규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고,
사진에서 보던 신라의 사신이 벽화 속에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하기도 했지만
우리가 갔을 때에는 한국과 관계가 있는 몇 개의 석굴 밖에 볼 수가 없었고
촬영은 절대 금지라, 전할 수 없음을 양해해주세요.










▼ 외부에 노출 된 벽화이기에 촬영이 가능했습니다.
▼ 사리탑 / 최근에 만들어 진 것이랍니다.


출처 : 푸른날개
글쓴이 : 여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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