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제
기원전 246년 성을 잉(瀛),이름을 정(政)이라 하는 열세살 소년이 진나라 왕위에 올랐다.
그는 스물세살 때 실권을 잡고 기원전 230년부터 군사를 일으켜 이웃 나라들을 정복했다.
그의 군대와 전술이 어찌나 뛰어났던지 여섯 강국이 무너지자 나머지 나라들은 지레 겁을 먹고 무릎을 꿇었다.
10년도 못돼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그는 전설에 나오는 3황5제를 모두 겸했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황제라 일컬었다.
뒷날 그는 황제 칭호를 처음 썼다는 뜻으로 시황제 또는 진시황이라 불렸다.
오늘날 차이나라는 말은 진(秦·Chin)나라 이름에서 비롯한 것이다
시황제는 진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자기 무덤터를 잡고 공사를 벌였다.
36년이나 걸려 만든 그의 무덤은 왕성을 그대로 지하에 옮긴 듯이 거대하고 호화롭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유명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가 황제가 되자마자 리(驪) 언덕에서 엄청난 토목공사가 시작되었다.
온 나라에서 끌려온 70만명이 거기서 일했다. 그들은 세 군데나 지하수가 흐르는 곳까지 파들어가 무덤을 만들었다.
그 지하수들은 무덤 안 지하 도시를 흐르는 황허ㆍ양쯔 두 강이 되었으며,수도 셴양을 본뜬 이 도시는 궁궐들의 축소판으로 가득 찼다.
온갖 금붙이와 보물이 큰 궤 3개에 가득 담겼다.
황제의 관 둘레는 구리를 녹여 둘렀으며,이 구리벽을 뚫고 들어가는 사람은 화살 세례를 피할 수 없게 설계되었다.
진나라의 왕성이 재현된 이 지하 도시에,고래기름으로 만든 초가 황제의 영생를 밝히며 꺼지지 않고 탔다.
시황제의 무덤가에는 성벽과 망루·탑·사원 따위가 있었는데,이곳을 침략했던 반달족이 불태웠다.
그러나 내성(둘레 2,543m) 외성(둘레 6,294m) 두 겹으로 둘러싸인 지하 도시만은 침략자의 말발굽을 피했다.
무덤을 파헤친 항우도 지하 도시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널따란 옥수수밭 한가운데의 초라한 언덕,높이 55.5m 길이 300m쯤 되는 3층 무덤 위에는 소나무와 들꽃이 뒤덮여 있다.
그러나 이 무덤의 참모습은 1917년에 이곳을 찾은 프랑스 탐험가 사갈랭이 제대로 짚은 바 있다.
“중국에 있는 것 가운데 가장 기념할 만한 것이 바로 이 무덤이다.”
과연 그의 말이 맞았다. 무덤은 아직 발굴되지도 않았는데,기껏해야 부장품을 묻었을 뿐인 주변의 땅굴(병마용갱)이 벌써 인류의 8대 불가사의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진시황릉옆의 병마용박물관
무덤과 그 서·남·북 둘레를 모두 발굴한다면,아마도 인류 역사에서 가장 방대한 유적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때가 언제일까? 진시황릉이 언제쯤 전부 발굴되겠느냐는 질문에 한 중국 고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내는 중국의 미덕이다.
발굴은 천년을 더 갈지도 모른다.
그때는 우리도 유물이 되어 있으리라.”
병마용박물관
출처 : 푸른날개
글쓴이 : 여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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